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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쪽 중에서>
저는 매 설교의 들머리를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주일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의 언어로 듣게 하는 디딤돌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미디어 자료를 적극 활용합니다. 설교의 속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 일상을 판단하고, 고치고, 허물고, 새롭게 다시 세우지만, 그래서 그런 토대 위에서 성경 본문을 읽고, 사색하고, 새기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경 말씀의 세계와 아날로지(analogy)를 이루는 삶의 현실을 깨우치는 일에도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런 토대에서 설교 제목을 늘 동사형으로 정하였습니다. 설교 제목에, 해석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시도하였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 보면, 어느 성경 본문을 대해도, ‘응 그것’이라고 하면서 설교의 줄거리를 미리 짐작해 버리는 성도들의 타성(?)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 설교에는 다섯 개의 소제목이 있습니다. 이 소제목이 실제 설교에서는 성도의 귀에 고스란히 들리지는 않지만, 설교자인 저로서는 설교 내용을 숙지•암기하도록 돕는 소중한 장치입니다. 이 소제목은, 설교의 들머리에 소개된 삶의 이야기를 빼고 보면,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기승전결 형식으로 찾아가는 차림새이기도 합니다. 읽기에 따라서는, 이 다섯 개의 소제목은 입말로 선포되었던 설교를 성경 해석 에세이로 읽어 가게 하는 내비게이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약 중에서>
01 창세기 / 하나님과 같이하면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창 17:1-8)
마이클 콜린스 / 아폴로 11호에 탑승해서 달 탐사에 나섰던 우주비행사는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 버즈 올드린(Buzz Aldrin, 1930-),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1930-2021) 세 사람이었습니다. 이 중 콜린스는 달 표면에 가장 먼저 인류의 발자국을 남긴 암스트롱이나 그 뒤를 이어 내린 올드린과는 달리 달 코앞까지 가서도 달을 밟아 보지 못했던 주인공입니다. 동료가 달착륙선을 몰고 탐사하는 동안 NASA(미 항공우주국) 관제 센터와 교신해야 했기에 사령선과 기계선을 몰고 달 궤도를 돌았습니다.
아브람이 아흔아홉 세 되었을 때에 /
아브람의 나이 구십구 세란, 그가 175세에 죽었던 것을 고려하면(25:7), 아브람의 중년기에 해당합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아브람의 중년기에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2은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을 ‘잉태할 힘을’ 잃어버린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의 나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브람의 처지가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었던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겠다고 설쳤습니다. 그러다가 구십구 세가 되면서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브람이 드디어 하나님 앞에 항복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아흔아홉 세 되기 전까지 / 그러나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로 시작하는 창세기 17:1은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라는 말로 끝나는 창세기 16:16과 견주어 파악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당대의 풍속을 따라 하갈과의 사이에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맨 처음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습니다. 당시의 기준에서 복은 자손들이, 아들들이 쑥쑥(!)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지 10년이 다 되도록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래가 당시의 풍속에 따라서 자기가 부리던 종을 아브람의 첩으로 들여서 대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그 보도가 창세기 16:16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창세기 16:16과 17:1 사이에는 13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세 때에”라는 창세기 17:1의 서두는 13년의 공백을 배경으로 삼아서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이 되면서 / 아브람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라는 말은 ‘너는 내 앞에서 반복해서 걸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습관을 지니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팬이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실천하라는 주문입니다. 아브람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듣는 순간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아브람은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았습니다. 자기 삶의 여정을 하나님의 계획에 맡겼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브람의 생애의 주도권이 아브람에게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주도권을 하나님께로 넘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짐하십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언약의 속내는 이어 주기, 연결하기입니다. 막혀 있었던 소통의 길을 하나님이 다시 여십니다. 그 언약이 신약의 말로는 신앙고백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님에게 무엇이라고 고백하였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언약은, 신앙고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새기게 하는 디딤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본문5-8절에서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모두 몇 번이나 “내가”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 본문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모든 약속에는 징표가 따릅니다. 하나님이 다짐하시는 약속에도 징표가 따릅니다.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 부르십니다(17:5).
‘아브람’의 뜻도 만만치 않습니다. ‘고귀한 조상’이란 뜻입니다. 자기를 뽐내고, 자기를 과시하는 인생이란 의미가 아브람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부르려고 하십니다. ‘많은 무리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홀로 고고한 삶을 살던 자를 변화시켜 이제부터는 많은 사람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자기만을 뽐내며 살던 인생을 뒤로하고 뭇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인생으로 쓰시겠다는 뜻입니다.
<신약 중에서>
08 고린도후서 / 사도 바울이 연주하는 ‘G선상의 아리아’를 들어 보십시오(고후 12:5-10)
G선상의 아리아 / 우리에게 친숙한 클래식 음악 중에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 D장조 제2악장 ‘G선상의 아리아’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으로는 드물게 연주 시간이 5분 남짓으로 짧지만 긴 울림을 지닌 곡입니다. 많은 뒷이야기를 남긴 음악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바흐가 어느 농가에 들렀는데, 그 집 아이들이 바흐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바이올린을 가져오게 했는데, 바이올린의 줄들이 다 끊어지고 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흐는 그 남아 있는 한 현을 켜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연주한 곡이 ‘G선상의 아리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리아’란 ‘선율에 의한 곡조’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아킬레스건 / 고린도후서는 사도의 직무를 밝히는 말씀(2:14-7:4)으로 시작해서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변호하고자 그의 적대자들과 벌이는 논쟁(10-13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바울이 자기변호에 나선 것은 그에게는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부름을 받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가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자랑하려고 하는 것 / 본문에서 바울이 자랑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핏 이 구절에서 바울이 가리키는 사람은 두 명처럼 보입니다. “이런 사람”과 “나.”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같은 사람입니다. 본문의 “이런 사람”은 실상은 바울 자신을 가리킵니다. 자기 자신을 3인칭체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환상 체험을 했습니다(12:1-4). 기도 중에 셋째 하늘까지,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는 곳까지 이끌려 갔습니다. 바울은 자기 사도직을 변호하고자 자기를 내세우려면 이것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겪은 환상 체험을 3인칭으로 소개합니다. 괄호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자랑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자랑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약한 것들”(복수형)입니다.
약함의 미학 / 바울의 고백은 약점을 평가하는 우리의 시선을 달리하게 합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약한 것들”이라는 낱말은 문자적으로는 그 쓰임새가 부정적입니다. 흔히 약점 때문에 못한다, 약점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그런 어휘의 쓰임새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약점 까닭에 기도한다, 약점 까닭에 성숙해진다, 약점 까닭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약함, 그리스도의 능력을 담는 그릇 / 이제 본문은 마침내 바울에게 있었던 가장 큰 약점을 털어놓습니다.
바울은 참 많이 약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육체에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습니다. 안질이나 간질로 보기도 합니다. 선교 여행 중 겪었던 시련으로 망가진 육신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합니다. 가시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틀림없는 것은 그것이 그의 몸을 찌르는 가시라는 사실입니다.